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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선을 생각했다.

 

나는 무령왕릉을 공부하면서 처음으로 백제의 미감을 배웠다. 남조와 왜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우아하고 세련된 선에 관한 찬사가 인상적이었다. 많은 이들이 백제만의 미감을 이야기했다. 세련되고 우아하다고 했다. 나는 진묘수를 들여다보며 그의 몸을 에워싼 날개 같은 장식의 문양에 빠져들었다. 그러면서 나의 미감에 관해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나는 과연 무엇을 아름답다 느끼고, 세련되고 우아하다는 찬사를 보내는가.

 

대칭되지 않는 구조와 둥근 선, 거친 마감에서 읽을 수 있는 목공사의 흔적, 다양한 것들이 고유한 모습으로 혼재한 상태, 나보다 먼저 이 길을 걸은 이들의 흔적을 발견하는 기쁨, 널리고 널린 익숙한 것들만 줄 수 있는 안락함. 나는 그것들이 세련되었다고 우아하다고 불러주고 싶다. 그 선포 위에 나는 흙을 올린다.

 

자주 흙으로 돌아가는 것에 관해 생각한다. 언젠가 차 안에서 가까운 친구와 죽음 숭배하는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던 때가 생각난다. 독서 모임에서 나눈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며, 친구는 이야기를 시작했었다. 듣고 보니 언젠가 우리의 삶은 끝이나고 우리의 후대가 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며 살아내야 하는 사실을 직면하는 것이 죽음을 숭배하는 일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숭배한다고 하니 거창한 느낌인데, 우리의 생이 영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일이다. 더불어 사는 일, 지속가능성에 관한 고민은 허락된 우리의 시간을 전제해야만 하겠다고 친구의 이야기에 동의했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참 오래 영원히 살 것처럼 자신을 단련하는 일, 성장과 발전에 중독되어 현재를 담보하는 삶을 경계해왔다는 발견이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따금 삶의 버거운 여정에 압도되면, 그 괴로움과 불안함의 한복판에서 특히 오래 머물며 흙으로 돌아가는 일을 생각해왔다.

 

자주 이 모든 노력과 수고가 그 어떤 나아감에도 - 개인적이든 공공적이든 - 보탬이 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한다. 어쩌면 지금도 그 걱정의 한복판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에 관해 생각한다. 모든 것이 끝나고 흙이 되면 나는 또 어떤 잡초에 꼭 필요한 양분이 될까. 그렇다면 살아 있는 내내 그토록 갈망하던 나의 염원이 결국엔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나는 예술 언어를 업으로 세상에서 기능하는 구성원으로 거듭나는 염원을 품고 산다. 그 염원이 벅차고 괴로울 때, 나는 흙으로 돌아가는 생각을 해야겠다. 한 줌의 흙이 고스란히 품게 될 나의 여정과 그 안의 이야기들을 생각해야겠다. 결국 어떤 들풀이 되어 자라 줄 거라고, 어쩌면 물길 따라 전 세계를 돌아다닐 수도 있다고 힘주어 말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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